나는 성격이 급하다. 그런데 나름 합리적이다.
나는 성격이 급하다.
얼마나 급하냐면, 예전에 친구와 약속을 잡으면 늘 10분쯤 먼저 도착했다. 그렇다고 얌전히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 도착했어.”
잠시 후.
“나 여기 좀 둘러보고 있을게.”
또 잠시 후.
“나 지금 여기야. 이쪽으로 와.”
거의 1분에 한 번씩 전화를 했다.
친구가 늦는다고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기다리면서 가만히 있는 게 안 됐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내 위치를 계속 알려줘야 했던 거다.
친구 입장에서는 참 피곤했겠다.
우리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세 대 있다.
나는 세 대를 다 누른다. 어느 게 먼저 올지 모르니까. 빨리 오는 걸 타면 되잖아?
물론 한 대가 오면 나머지는 취소한다. 나 그렇게 매너 없는 사람 아니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닫힘 버튼은 이미 누르고 있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전자레인지도 마찬가지다.
10초 남았으면 그냥 연다. 10초 덜 데워졌다고 못 먹는 것도 아닌데, 그걸 굳이 끝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나?
택배는 쿠팡 로켓배송을 이용한다.
기다리기 싫으면 빨리 오는 걸 시키면 된다. 참 간단한 문제다.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병원에서는 기다린다. 어쩔 수 없으니까.
맛집도 대체할 곳이 없으면 기다린다. 그런데 주변에 비슷하게 맛있는 집이 있다면? 거기로 가면 된다. 맛이 그렇게까지 차이 나던가?
오사카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는 익스프레스 패스를 샀다. 롯데월드에서는 대기시간이 짧은 놀이기구부터 탄다.
나는 기다릴 줄 안다. 다만 안 기다려도 되는 상황에서 굳이 기다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이 성격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친다.
대표적인 게 오사카 여행이다.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으면 항공권, 숙소, 일정까지 하루 만에 끝내버린다. 며칠씩 고민하는 게 더 피곤하다.
그렇게 신나게 예약을 마쳤는데 출발 공항이 인천공항이 아니라 김포공항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또 간사이공항(KIX)이 아니라 고베공항이었다.
아이고야.
예약을 변경하느라 돈은 돈대로 날리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더 웃긴 건 그렇게 기를 쓰고 여행 계획을 세워놓고 정작 현지에 가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다.
계획 세우느라 이미 진이 다 빠졌다.
일단 도착하면 즉흥적으로 돌아다닌다.
이럴 거면 그 계획은 왜 그렇게 열심히 세웠을까?
쇼핑도 참 묘하다.
첫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해도 바로 사지는 않는다. 모처럼 쇼핑하러 나왔는데 첫 가게에서 끝내기는 아쉽잖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비교한다.
그런데 자꾸 처음 본 옷이 생각난다.
결국 처음 가게로 돌아간다.
이렇게 보면 나도 제법 신중한 사람이다.
물론 인터넷에서 뭔가에 꽂히면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결제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 후회하면서.
내 귀가 좀 얇다.
그렇다고 남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잘 듣는다.
단, 결론부터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게 말이야, 어제 누구를 만났는데 사실 그전에 이런 일이 있었거든…”
아오. 그래서 뭔데!
나한테 약 파냐? 왜 말을 빙빙 돌리고 있어.
그렇다고 내가 긴 글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웹툰보다 웹소설이 좋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어릴 때는 잡지를 페이지 숫자까지 읽을 정도였다.
지금도 물건 뒷면의 작은 설명까지 꼼꼼히 읽는다. 이케아 조립설명서가 아무리 어려워도 끝까지 읽는다. 몇 시간이 걸려도.
전자레인지 10초는 못 기다리면서 설명서는 몇 시간씩 읽는다니.
나도 참 일관성이 없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는 또 다르다.
재미있어도 인터넷에서 스포일러를 찾아본다.
결말을 알고 봐도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
재미없으면?
스포만 읽고 그냥 잔다.
굳이 끝까지 보면서 시간을 쓸 필요가 있나.
식당에서는 조금 우아해졌다.
예전에는 내가 먼저 주문했는데 다른 테이블 음식이 먼저 나오면 항의하기도 했다.
남편이 제발 항의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얌전히 기다린다.
다만 그때부터 내 시선은 음식 나르는 직원에게 고정된다.
저건가?
아니네.
이번엔 우리 건가?
또 아니네.
겉으로는 우아하게 앉아 있다.
속으로는 이미 몇 번이나 주방에 다녀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도 많이 점잖아진 모양이다.
요즘은 AI로 이미지도 만든다.
휴대폰에서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동안 진행률이 몇 퍼센트인지 보일 때가 있다.
이게 참 마음에 든다.
얼마나 진행됐는지 알면 기다릴 만하다.
그런데 PC에서는 그 퍼센트가 안 보인다.
그냥 이미지 생성 중이란다.
그래서 지금 몇 퍼센트인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건데?
아오, 답답해.
생각해 보면 나는 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별로 노력하지 않은 것 같다.
대신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왔다.
물론 그러다 오사카 공항 같은 사고도 친다. 돈까지 날렸으니 그때만큼은 좀 천천히 확인했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내가 그렇게 비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0초 덜 데워진 음식도 잘 먹고, 엘리베이터 나머지 호출도 취소하고, 병원에서는 얌전히 기다릴 줄도 안다.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나?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
내 순리가 좀 빠를 뿐이다.